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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생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직장 드라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자회사와 계약 관련 연락을 주고 받으며 이사님께 보고서를 올리던 어느 밤, 화면 속 장그래의 표정이 제 얼굴처럼 느껴졌습니다. 화려한 성공 스토리 없이, 복사기 앞에서 씨름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무실도 현장이다 — 장그래가 처음 발 디딘 곳
혹시 첫 직장에서 복사기 하나 못 다뤄서 등줄기가 서늘했던 기억, 있으신가요? 26세 고졸 검정고시 출신 장그래는 컴활 2급 자격증 하나를 들고 원인터내셔널 영업 3팀 인턴으로 발을 들입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복사기 앞에서 무너집니다. "26년 동안 뭘 했냐"는 말이 공중에 떠도는 가운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며 제 입사 첫 주를 떠올렸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데 모르면 혼나는 그 이상한 논리 말입니다.
장그래가 초반에 저지른 실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폴더 재분류 사건입니다. 오 과장이 건넨 서류 폴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리했다가 된통 혼납니다. 이른바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 즉 표준 업무 절차를 어긴 셈입니다. 여기서 SOP란 조직 안에서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통 기준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처음엔 이게 왜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내 방식이 더 효율적인데 왜 바꾸느냐 싶었죠. 그런데 자회사와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업무를 반복하다 보니, 규칙이 없으면 협업이 무너진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장그래는 PT 준비 과정에서 "사무실도 현장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웁니다. 닳아빠진 실내화를 들고 와서 기획·판단·검토의 과정이 공장 라인만큼이나 치열한 전쟁터임을 역설하는 장면은, 화이트칼라 노동의 무형 가치를 정면으로 다룬 몇 안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출처: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서비스업 종사자 비율은 전체 취업자의 70%를 넘습니다. 그 70%의 땀이 '비현장'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장그래는 닳은 신발 한 켤레로 반박한 셈입니다.
- SOP(표준 업무 절차) 준수 — 개인 효율보다 조직 협업이 우선인 이유
- 인턴 PT 통과 — "사무실도 현장"이라는 논리로 임원 공감을 이끌어낸 장면
- 버티는 게 이기는 것 — 오 과장이 계약직 합격 후 건넨 첫 번째 조언
비정규직의 벽 — 아무리 잘해도 보이지 않는 천장
요르단 중고차 사업 비리를 파헤친 사람이 장그래였는데, 정작 사업이 재추진될 때 그는 담당자 명단에서 빠집니다. 이유는 단 하나, 계약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성과는 조직의 것이 되고, 신분은 개인의 한계가 되는 그 구조 말입니다.
여기서 극이 정면으로 다루는 개념이 바로 고용 이중구조입니다. 고용 이중구조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승진·고용 안정성의 격차가 구조적으로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국내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약 37%에 달하며, 이들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60~70% 수준에 그칩니다. 장그래가 겪는 서러움은 드라마 속 설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저는 요즘 프리랜서나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는 젊은 분들을 볼 때면 장그래의 얼굴이 겹칩니다. 소속감 없이 표류하는 그 감각이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지,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불안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자라 마주할 노동 환경이 지금보다 더 유동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극을 보며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한편 오 과장이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데려오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일부 걸었던 선택은, 드라마가 가장 인간적으로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멘토링(Mentor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경험 많은 사람이 성장 가능성 있는 후배를 이끌어주는 관계입니다. 오 과장과 장그래의 관계는 교과서적 멘토링을 훌쩍 넘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잃을 각오를 하는 수준까지 나아갑니다. 이 설정이 설득력 있었던 건, 그것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님을 극 내내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완생을 향해 — 2026년에 미생을 다시 본다는 것
미생(未生)이라는 바둑 용어가 있습니다. 완전히 살아 있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 즉 아직 집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돌을 가리킵니다. 반대말은 완생(完生)입니다. 제가 매달 자회사와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과정이 무슨 의미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단어가 생각납니다. 지금 내가 미생의 상태라는 게 실패가 아니라, 아직 완성 중이라는 의미라고요.
2026년의 직장 풍경은 극 중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복잡한 데이터 분석이나 번역은 AI가 처리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보다 빠른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써보면서 느낀 건,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부서 간의 미묘한 이견을 조율하고, 오 과장이 문충기 대표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해 계약을 따낸 것처럼 사람의 맥락을 읽는 일 말입니다. 이른바 관계 자본(Social Capital), 즉 신뢰와 네트워크에서 비롯되는 무형의 자산은 알고리즘이 아직 흉내 내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미생의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요르단 현지 비리 수사 장면이 첩보물처럼 전개될 때, 초중반의 그 지독한 사실감이 잠깐 흩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오피스 내 폭력과 괴롭힘이 극적 긴장감을 위한 반복 장치로 쓰인 점도 조금 과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그런 환경을 겪어본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일상을 갉아먹는지를 아는 만큼 더 절제된 시선으로 다뤄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랬다면 이 작품이 전하려 했던 위로가 더 오래 남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미생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미생입니까, 아니면 완생입니까? 저는 아직 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다는 것도,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며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 지셨다면, 저는 1화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화려한 클라이맥스보다 장그래가 처음 복사기 앞에 서는 장면, 그 작은 순간에 이 드라마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 나서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나는 지금 어느 돌인가. 미생이어도 괜찮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