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흔한 의료 드라마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틀었다가, 첫 화가 끝나기도 전에 진한 감동에 목이 메였던 드라마였습니다. 지방의 낡은 돌담병원, 고장 직전의 장비, 그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칼을 드는 의사. '낭만닥터 김사부'는 드라마였지만, 요즘 뉴스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과 겹쳐지면서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드라마 속 돌담병원, 현실의 필수의료가 보였다제가 직접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판타지가 아니구나"였습니다. 극 중 김사부가 평생을 걸고 완성하려 했던 것이 바로 권역외상센터입니다. 권역외상센터란 24시간 중증 외상 환자를 전담 치료하는 국가 지정 시설로, 교통사고나 추락처럼 즉각적인 외과 처치가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최후의 보루입니다. 문제..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된 건 2015년의 일입니다. '태완이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드라마 '시그널'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17년이라는 숫자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허구의 이야기인데도, 이게 단순한 수사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낡은 무전기가 상징하는 것이재한 형사가 품에 간직하던 무전기는, 극 중에서 단순한 통신 장비가 아닙니다. 첫사랑의 기억과 수사관으로서의 신념이 함께 새겨진 물건으로 묘사됩니다. 저는 이 설정이 처음엔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재한이 그 무전기를 붙잡고 있는 장면들을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물건에 기억이 깃든다는 감각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오래된 수첩이나 낡은 볼펜 ..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다가 문득 멈칫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D.P. 시즌2를 보는 내내 그랬습니다. 초등학생 두 남매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들이 머지않아 군대에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영장을 받아들던 그 시절의 감각이 살아나며 마음 한켠이 꽤 복잡해졌습니다. 탈영병을 쫓는 추적극으로 시작했지만, 이번 시즌은 결국 '이 시스템을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훨씬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시스템 폭력 — D.P. 가 이번에 겨눈 것시즌1이 군대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개인 간의 폭력을 정면으로 다뤘다면, 시즌2는 그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 자체를 묻습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계속 나오는데 정작 국가와 군 조직은 한 발 물러서 있다는 이 질문 — 저는 이게 시즌2가 가진 가장 큰 의미라고 봅니다.드라마 ..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가장 깊이 상처받는 일,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그 불편한 진실을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작해 마흔 넘은 어른의 마지막 여정까지 따라가며 보여줍니다. 저는 조카들이 게임 컨트롤러를 붙잡고 얼굴 붉히다가 금세 한편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드라마가 왜 이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는지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미움인지 선망인지, 양가감정이라는 감정의 덫두 사람의 관계는 1992년, 열한 살의 교실에서 시작됩니다. 반장 천상연이 선생님을 대신해 류은중의 손바닥을 때리는 장면, 솔직히 처음엔 단순한 권력관계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전개를 보면 은중이 상연을 '미워하면서도 선망했다'는 설정이 훨씬 핵심에 가깝습니다. 은중에게 상연은 자신이 갖지 못한 유복한..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해외 지사 담당자로 빈틈없이 굴러가던 직장인이 아이들 앞에서 한없이 무장해제되는 아빠로 바뀌는 그 찰나가,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일상을 통째로 맞바꾸며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울림을 건넵니다.정체성 교환이 건드린 것, 번아웃의 민낯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볼 요량으로 틀었는데, 1회가 끝날 때쯤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불편해졌습니다. 서울에서 에이스 변호사로 살아가는 유미래가 번아웃(burnout) 직전에 몰린 장면이 너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번아웃이란 극도의 직업적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감정적·..
만원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싶었던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 순간이 꽤 오래 쌓인 다음에야 드라마 한 편을 통해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무뎌진 일상 속 감각을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특별한 사건도, 화려한 반전도 없는데 보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먹먹해집니다.출퇴근 번아웃, 길 위에서 에너지가 다 타버린다경기도 산포시에서 서울로 매일 출퇴근하는 삼 남매의 이야기로 드라마는 시작됩니다. 창이는 "경기도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자차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미정은 경기도를 계란 흰자에 비유합니다. 서울이라는 노른자에서 멀리 떨어진 흰자, 존재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공간이라는 표현이 꽤 날카롭게 와닿았습니다.일반적으로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