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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형사물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순간 멜로 영화를 본 것 같은 잔상이 온종일 지워지지 않았거든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도, 가장 지독하고 파괴적인 감정의 무게를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얹어놓은 작품입니다.
수사극이 멜로가 되는 순간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처음 30분은 분명히 범죄 수사물이었습니다. 변사자 기도수의 추락 사망 사건, 산 정상에서 시작되는 현장 조사, 소지품에 새겨진 'KDS' 이니셜과 위스키. 형사 해준은 이 조각들을 꼼꼼하게 맞춰가며 기도수가 소유욕이 강한 인물이었음을 읽어냅니다.
그런데 서래를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등의 밴드, 어설픈 한국어 속에 불쑥 튀어나오는 의미심장한 단어,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 그 눈빛을 보는 해준의 표정이 저는 내내 신경 쓰였습니다. 의심인지 관심인지 스스로도 구분 못 하는 것 같은 그 얼굴이요.
정서경 작가는 이 작품의 핵심으로 멜로 플롯과 수사극 플롯의 일치를 꼽았는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말이 정확했습니다. 두 사람이 조사하는 모습 자체가 이미 연애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거든요. 해준이 서래의 밴드를 방수 밴드로 갈아 끼워주는 장면은, 수사라는 형식을 빌린 가장 정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색채로 읽는 감정선: 미장센의 언어
이 영화를 두 번 봤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게 있습니다. 색채입니다. 프레임 안에 배치된 조명, 의상, 소품부터 배우의 위치까지 철저하게 설계하는 미장센(mise-en-scène)은 대사 한마디 없이도 두 사람의 위태로운 감정 상태를 스크린 위에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빨간색은 해준의 의심과 사건의 피를 상징하며 기도수의 소지품과 해준의 장비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파란색은 서래의 존재감과 해준의 깊어지는 관심을 표현하고, 영화 중반부터 해준은 점점 파란색에 물들어 갑니다. 초록색은 두 색이 섞이는 지점, 즉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가는 감정의 교차점을 나타냅니다.
두 인물을 각기 다른 색 계통에 배치하여 심리적 거리를 시각화하는 색채 분리(color separation) 기법은 후반부 파란 원피스를 입은 서래와 파란 톤으로 조명된 해준의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제 경험상 이건 그냥 보고 넘기기엔 너무 아까운 포인트였습니다. 두 사람이 닮아가는 동시에 멀어지기 시작한다는 신호를 색으로 먼저 알려주는 거니까요.
드론 샷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항공 장비를 활용해 피사체를 조감도로 포착하는 드론 샷(drone shot)은 산과 바다, 섬이라는 공간을 압도적인 스케일로 담아내며 두 사람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적 광활함과 철저한 고립감을 동시에 체감하게 만듭니다. 극장 스크린으로 봐야 제대로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앵글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과 캐스팅의 선택
헤어질 결심은 202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박찬욱 감독으로서는 올드보이, 박쥐에 이은 세 번째 칸 수상으로, 한국 감독 최다 칸 수상 기록입니다(출처: 칸 국제영화제 공식 사이트).
감독은 관람 전 기존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라고 직접 당부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은근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관객을 완전히 장악하는 영화였거든요.
탕웨이 캐스팅도 감독이 오래 기다린 결과였습니다. 섬세하고 고혹적인 무언가를 탕웨이에게서 발견했다고 밝혔는데, 스크린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그 선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래는 설명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박해일이 연기한 해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도 어느새 서래를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간극이 이 영화의 핵심 긴장감입니다.
캐릭터 심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나 관계가 지속적인 집착과 반추를 유발하는 심리적 상태인 미결(Unresolved)은, 서래가 해준의 잠복 감시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의 불면을 치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모순적인 설정을 통해 완벽하게 영화적으로 구현됩니다.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 그게 해준에게 서래였고 관객에게 이 영화였습니다.
아쉬운 점도 솔직히 말하자면
하지만 완벽한 걸작이라는 세상의 찬사 이면에는, 제가 극장에서 스크린을 마주하며 느꼈던 분명한 이물감도 존재했습니다.
가장 뼈아팠던 건 대사 톤이었습니다. 인물들의 대사가 지나치게 문어체적이고 연극적이어서, 배우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된 문장을 낭독하는 것처럼 들리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몰입하다가 한 발짝 물러서게 되는 그 찰나의 거리감이 아쉬웠습니다.
주변 인물 처리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서래의 두 남편인 기도수와 임호신은 각각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됩니다.
- 기도수: 소유욕 강하고 폭력적인 악역으로 단선적으로 그려짐
- 임호신: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소비되며 서사적 깊이 부재
두 주인공의 심리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주변 인물들이 그 심리전을 위한 배경 장치로만 기능하고 말았습니다. 치밀한 수사극을 기대했던 분이라면 후반부에서 헛헛한 뒷맛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헤어질 결심은 국내 개봉 후 누적 관객 186만 명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상업적 성과는 다소 제한적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이 영화가 얼마나 대중적 쾌감보다 미학적 완성도에 방점을 뒀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한 번 보고 "좋았다"로 끝나는 영화가 아닙니다.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서래의 마지막 선택이 자꾸 떠오르고, 두 번째 볼 때 처음에 못 본 색채와 앵글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단점이 분명히 있고 호불호도 갈리지만, 그 잔상의 밀도만큼은 쉽게 따라올 작품이 없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가능하면 극장 스크린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드론 샷 한 컷만으로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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