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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쟁 영화란 모름지기 영웅의 활약이나 극적인 역전 장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덩케르크는 그 어떤 통쾌한 역전도 없이, 그냥 살아남는 이야기만 두 시간 동안 밀어붙입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압도적인 몰입감, 그러나 감정 이입이라는 벽

덩케르크가 만들어낸 몰입감의 핵심에는 사운드 디자인과 비선형 서사 구조(Non-linear Narrative Structure)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교차해 편집하는 비선형 서사 구조(Non-linear Narrative Structure)는 관객으로 하여금 해변의 일주일, 바다의 하루, 하늘의 한 시간을 동시에 체험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립니다. 처음에는 이 얽힌 시간축이 헷갈려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며 탈출의 긴박함을 극대화하는 연출은 실로 압도적이었습니다.

 

한스 짐머가 맡은 음악도 이 구조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그가 활용한 기법은 셰퍼드 톤(Shepard Tone)인데, 음이 끝없이 상승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셰퍼드 톤(Shepard Tone)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박함을 청각적 환상으로 치환하여 관객의 심박수를 쥐락펴락합니다. 시곗바늘 소리와 결합된 이 집요한 긴장감 때문에, 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견이 갈립니다. 이 몰입감이 진짜 감동으로 이어지느냐는 다른 문제거든요. 덩케르크를 두고 "살아있는 체험 같았다"라고 극찬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영화가 끝난 뒤 묘하게 헛헛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그들이 왜 거기 있는지도 거의 알 수가 없었거든요. 캐릭터의 내면 서사를 철저히 배제한 놀란의 연출 방식은 분명 대담한 선택이지만, 저는 그 선택이 관객과 인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감정 이입을 가로막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과 개인 서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음
  • 세 개의 시간축이 교차되어 특정 인물에 집중하기 어려운 구조
  • 대사보다 사운드와 시각 이미지에 의존하는 연출 방식

이것이 단점이냐, 혹은 의도된 미학이냐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제 경험상, 캐릭터에 대한 최소한의 감정적 연결고리가 없으면 스펙터클이 아무리 완벽해도 가슴에 깊이 새겨지기는 어렵습니다.

비선형구조와 연대의 메시지, 지금 이 시대와의 접점

크리스토퍼 놀란이 덩케르크에서 선택한 것은 영웅 서사가 아니라 집단 생존의 기록입니다. 독일군에게 포위된 40만 명의 연합군을 구하기 위해 민간 선박까지 총동원했던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닌 평범한 이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만들어낸 인류사의 기적 같은 기록입니다. 수백 척의 소형 선박이 자발적으로 덩케르크로 향했던 그 헌신이 결국 약 33만 명의 생명을 구원해 낸 것이죠. 군함뿐 아니라 수백 척의 민간 소형 선박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결국 약 33만 명을 구조해 냈습니다(출처: 영국 국립기록관).

 

영화는 이 민간인의 자발적 참여를 꽤 묵직하게 다룹니다. 도슨이라는 인물이 아들과 함께 자기 배를 몰고 덩케르크로 향하는 장면은, 화려한 영웅주의 없이 그냥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오히려 더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 두려움을 안고 조타기를 잡는 그 행동이 결국 수십만 명의 생사를 가른다는 사실이요.

 

이 지점에서 영화는 2026년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와 기막히게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기후 위기나 끝없이 반복되는 국지전처럼,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거창한 시스템이 아니라 옆 사람이 내미는 손이거든요.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 분쟁으로 인한 강제 이주민 수는 1억 명을 넘어섰습니다(출처: 유엔난민기구(UNHCR)). 덩케르크의 해변과 지금의 뉴스 화면이 겹쳐 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물론, 이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려면 우리가 그 인물들에게 충분히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데, 영화의 구조가 오히려 그 감정 이입을 방해한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메시지와 형식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 저만 받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덩케르크는 분명 한 번쯤 봐야 할 영화입니다. 다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를 기대하고 앉는다면 분명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전쟁의 물리적 공포와 집단 생존이라는 주제에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극장 어둠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날것의 체험을 선물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도슨이 아들의 손을 잡고 덩케르크의 사지로 향했을 때, 그가 지키고 싶었던 건 국가의 승리보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평화였을 겁니다. 저 역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옆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그 평범한 용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ylGrDLwJ6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