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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과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도 솔직히 "애니메이션이 그 정도까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는 그 의심이 완전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름을 빼앗기는 순간, 정체성을 잃는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단순한 권선징악 구조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다시 봤을 때 이 작품은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설정은 이름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마녀 유바바는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존재의 이름을 계약서로 빼앗아 버립니다. 치히로는 '센(千)'이라는 이름을 강요받는데, 센이란 한자 그대로 '천 명 중 하나'를 뜻합니다. 개성 없는 노동자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입니다.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를 넘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일관된 인식인 자아정체성(Ego Identity)을 송두리째 강탈당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센(千)이라는 번호로 불리는 순간, 치히로는 고유한 인격체에서 대체 가능한 노동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노예를 만드는 고전적인 방식 중 하나가 이름을 없애는 것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구조를 온천장이라는 판타지 공간에 고스란히 이식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매일 아침 회사 이름이 찍힌 명찰을 달고 출근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 영화가 왜 어른들에게 더 깊이 박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치히로의 여정이 결국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하쿠 역시 코하쿠 강이라는 본명을 되찾으면서 저주에서 풀린다는 점은 이 작품의 주제를 압축합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물신 한 장면에 담긴 환경오염 비판
일반적으로 환경 메시지를 담은 영화라고 하면 직접적인 구호나 설교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이 그런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슈퍼 오물신이 온천장에 나타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악취가 진동하고 시커먼 덩어리로 뒤덮인 이 존재는 처음엔 그냥 혐오스러운 괴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치히로가 온천장 직원들과 힘을 합쳐 그 몸속에 박힌 이물질을 뽑아내자 자전거, 냉장고, 각종 생활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안에 있던 것은 사실 강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에 뒤덮여 오물덩어리가 된 강의 신.
인간이 버린 온갖 오물에 뒤덮여 본연의 신성함을 잃어버린 강의 신은, 자연의 비명을 시각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강력한 메타포(Metaphor)로 기능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더미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오만한 태도를 거울처럼 비춥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실제로 강에 버려진 자전거를 보고 이 장면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했던 부패의 숲, 이른바 오무의 이미지와도 맥락이 이어집니다.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를 거창한 연설 없이 단 한 장면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제가 직접 두 작품을 비교해 봤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일관된 연출 철학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하천 쓰레기 수거량은 최근 5년간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출처: 환경부). 오물신 장면이 단순한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가오나시가 악당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캐릭터는 주인공 치히로가 아니라 가오나시입니다.
가오나시는 일본어로 '얼굴이 없다'는 뜻입니다. 항상 가면을 쓰고 있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도 없이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캐릭터가 처음 기획에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러닝 타임이 3시간을 초과할 위기에 처하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토리를 압축할 강렬한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작 도중에 추가한 캐릭터라고 합니다.
가오나시는 치히로에게 사소한 친절을 받은 뒤 완전히 집착하게 됩니다. 황금을 내뿜으며 직원들에게 원하는 걸 다 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 채 계속 배고파합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야만 말을 할 수 있는 가오나시의 폭식은, 자신의 본질을 채우지 못한 채 외부의 자극만 갈구하는 현대인의 공허감(Emptiness)을 날카롭게 투영합니다. 무엇을 삼켜도 배고픈 그 모습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영혼의 심리적 공백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가오나시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무섭다기보다 측은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 삼키다가 결국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가오나시의 마지막 모습은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현대 심리학에서 자기 정체성 혼란은 우울감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가오나시가 악당으로 등장했다가 결국 제니바의 집에서 조용히 제 자리를 찾는 결말은 이 작품이 얼마나 입체적인 시선으로 인물을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모두가 다 상처를 갖고 있고, 모두가 다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린 시선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캐릭터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치히로: 자아정체성을 잃어버렸다가 스스로 되찾는 성장의 주체
- 하쿠: 이름을 잃고 정체성이 억압된 상태에서 치히로에 의해 해방됨
- 가오나시: 욕망과 공허함의 상징, 치유를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
- 유바바: 시스템의 지배자로서 타인의 정체성을 착취하는 권력 구조를 표상
하쿠와의 이별, 그 아쉬움은 설계된 것이었을까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상하게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그건 감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결말이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하쿠와 치히로는 공중에서 손을 잡고 떨어지는 장면에서 서로의 이름과 기억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터널을 지나고 나면 치히로는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히는 잊은 것이 아니라, 기억은 있되 일상으로 복귀한 상태입니다. 머리띠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설정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한 인물의 내면적 성숙과 사회적 성장을 심도 있게 다루는 성장 서사(Bildungsroman)의 관점에서 볼 때, 치히로가 평범한 열 살 소녀의 모습 그대로 일상에 복귀하는 결말은 화려한 영웅담보다 훨씬 정직하고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그런데 치히로는 외형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돌아옵니다. 이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정직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힙니다.
하쿠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을 남긴 채 닫혀 버리는 결말은 분명 찜찜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의 밀도에 비해 작별이 너무 담담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의 이별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의도된 연출임을 이해하지만, 관객으로서는 그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린, 가마 할아버지, 제니바 같은 조연 캐릭터들은 각자의 사연이 충분히 있어 보임에도 그 이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치히로의 성장이라는 단일한 축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이 조력자나 장애물 역할에 머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솔직히 아쉽습니다. 세계관이 이렇게 방대한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더 치밀하게 풀어졌다면, 지금보다 한 층 더 깊은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남습니다.
다시 봐도 이 영화는 분명 명작입니다. 하지만 명작이기 때문에 더 아쉬운 부분들이 보입니다. 이름을 빼앗기고도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던 열 살 소녀의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 다시 볼수록 다른 결로 마음에 걸립니다.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지금 바로 보시길 권합니다. 어린 시절 봤던 분들은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번에는 분명히 보일 것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봤습니다. 이번으로 세 번째입니다. 보면 볼수록 깊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치히로가 낯선 세계에서 끝내 제 이름을 지켜냈듯, 우리 아이들도 세상이라는 거대한 온천장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빛을 잃지 않고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빠로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들이 길을 잃었을 때 언제든 본래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도록 그 곁을 단단히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이번 보홀 여행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각자의 '진짜 이름'을 다시금 확인하는 소중한 쉼표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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