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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사극 웃음, 신파 비판, 배우 연기)

by 씨네마 고을 2026. 3. 28.

극장가가 이렇게 얼어붙었는데 사극 영화가 진짜 흥행할 수 있을까요? 저도 처음엔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2026년 2월 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역사책 속 비극적인 단종 이야기가 유해진 배우의 투박한 연기와 만나 영월 산골짜기에서 예상 밖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터뜨리게 만들었거든요. 천만 관객을 노리는 상업 영화 특유의 신파 연출이 조금 과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배우들의 애드리브와 즉흥적인 호흡이 만들어낸 명장면들은 충분히 극장을 찾을 가치가 있었습니다.

초반 웃음 코드와 사극 무게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장항준 감독은 이 영화에서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초반부를 거의 코미디처럼 풀어갑니다. 여기서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조선시대 최대 정치 사건을 의미합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는 단종을 유배지로 받아들이면서 마을에 경제적 이득이 생길 거라며 안재훈과 경쟁하는데, 이 과정에서 터지는 웃음 코드가 상당히 노골적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약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역사적으로 단종은 열 살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숙부에게 배신당해 쫓겨난 비극의 주인공인데, 영화는 유배지 촌장들이 콩고물을 노리고 경쟁하는 장면을 전면에 배치했거든요. 물론 유해진 특유의 피지컬 개그와 애드립이 웃음을 자아내는 건 사실입니다. 실제로 초반 30분 동안 관객들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극장에서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단종은 영월 유배 후 극도의 고립과 감시 속에서 생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통치 기록을 편년체로 정리한 공식 역사서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1차 사료입니다. 이런 역사적 무게감과 초반부의 코미디 톤이 충돌하면서 묘하게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사극 영화는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비극성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강력한 몰입을 만들어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나 <사도> 같은 작품들이 그랬죠.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다 초반에 너무 웃기려고 작정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차라리 엄흥도의 캐릭터를 투박하지만 진중한 촌장으로 설정하고, 단종과의 교감을 더 천천히 쌓아갔다면 후반부 감정선이 훨씬 자연스럽게 흘렀을 겁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특히 박지훈이 연기한 단종은 표정만으로 절망과 무기력을 표현해냈고, 유해진은 애드리브로 극장을 뒤집어놨죠. 영화평론가들은 박지훈의 연기를 두고 '아이돌 출신 배우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진 연기력'이라고 평가했습니다(출처: 씨네21). 하지만 뛰어난 연기력도 과도한 코미디 연출 앞에선 그 힘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반부 신파 연출, 감정을 쥐어짜는 상업 영화의 공식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장항준 감독은 본격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출을 꺼내 듭니다. 단종과 엄흥도가 이별을 앞두고 나누는 장면에서 슬로 모션과 웅장한 OST가 동시에 터지는데, 저는 이 순간 입맛이 조금 씁쓸해졌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과장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쌓아온 시간과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거든요.

한국 상업 영화는 전통적으로 멜로드라마적 감정 증폭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여기서 멜로드라마란 과장된 감정 표현과 선악 구도를 통해 관객의 눈물을 유도하는 서사 방식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 기법이 남용되면 관객이 오히려 감정에서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저도 극장에서 눈물을 닦으면서도 '왜 이렇게 연출을 과하게 하지?'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으니까요.

실제로 2024년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관객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40대 이상 관객층은 '과도한 감정 연출'을 영화 관람 시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요소로 꼽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정작 40대 이상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사극 영화인데,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신파 연출을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조금 아쉬운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차라리 단종과 엄흥도의 마지막 대화 장면을 롱테이크로 담담하게 담아냈다면 훨씬 더 강렬한 여운이 남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것처럼, 감정을 절제하고 건조하게 표현할 때 오히려 관객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증폭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애드립 장면만큼은 정말 빛났습니다. 특히 유해진이 단종에게 밥을 먹이며 건네는 대사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이 장면들이 오히려 대본보다 훨씬 더 진심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울컥했던 순간도 바로 이 애드리브 장면들이었거든요.

영화 속에서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엄흥도가 장례를 치러줬다고 기록되어 있죠. 이런 역사적 팩트가 주는 무게감은 어떤 연출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감동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겁니다. 이미 충분히 강력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굳이 신파 연출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결국 <왕과 사는 남자>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애드립, 그리고 역사적 팩트가 주는 무게감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코미디 톤과 후반의 신파 연출이 영화의 완성도를 조금씩 깎아먹었다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 극장가에서 보기 드문 웰메이드 사극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극 영화를 좋아하고, 배우들의 진심 어린 연기를 보고 싶다면 충분히 극장을 찾을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과도한 기대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관람하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1Qdvj--C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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