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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아버지가 위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게임 퍼블리싱 업계에서 숫자 압박에 시달리며 퇴근 후 아이들에게 무심코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지옥 같은 수용소 안에서 아들을 향해 끝끝내 웃어 보이던 귀도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세운 방어막, 심리적 회복탄력성의 구조

1944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 이송이 본격화되면서 귀도와 여섯 살 아들 조슈아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귀도가 선택한 생존 전략은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치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특별한 점수 따기 게임이라는 허구의 서사를 아이에게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비극조차 전혀 다른 의미 체계로 해석해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는 이 마법 같은 기법을, 귀도는 수용소라는 지옥 안에서 오직 부성애 하나로 구현해 냅니다. 그는 조슈아에게 수용소를 학살의 현장이 아닌, 1,000점을 따기 위한 거대한 게임판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에서도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개념인데, 귀도는 이론도 훈련도 없이 오직 부성애 하나로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다시 돌려보면서 느낀 건, 귀도의 전략이 단순한 감언이설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조슈아가 겁을 먹을 때마다 즉흥적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상황이 무너질 것 같으면 또 다른 이야기를 덧댔습니다. 그것은 즉흥 연기가 아니라, 매 순간 아이의 심리 상태를 읽고 반응하는 고도의 정서 조율이었습니다.

심리적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도 여기서 짚고 가야 합니다. 극한의 역경 속에서도 정서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인 심리적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아동기에 경험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정적인 정서 환경에서 싹을 틉니다. 귀도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아들의 영혼에 이 단단한 탄성을 심어준 셈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아동기에 안전하고 긍정적인 정서 환경에 노출될수록 성인이 된 이후 회복탄력성 지수가 유의미하게 높아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귀도는 결과적으로 죽음의 수용소 안을 아들을 위한 가장 안전한 정서적 요람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 위대한 헌신 앞에, 실적 마감일의 피로를 핑계로 아이에게 '잠깐만'을 연발하던 제 모습이 투영되어 못내 부끄러워졌습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극한의 공포 앞에서 부모의 정서적 태도가 아이의 생존 심리를 결정한다
  • 인지 재구성은 전문 치료사만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본능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 심리적 회복탄력성은 훈련이 아니라 관계의 질에서 형성된다

낭만화된 홀로코스트, 카타르시스인가 역사 왜곡인가

이토록 위대한 부성애 서사 뒤에는 제가 오랫동안 걸려있던 불편함이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가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역사적 비극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종 청소로 기록된 홀로코스트(Holocaust)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실제 기록과의 정합성을 따지는 역사적 고증의 잣대를 의도적으로 비껴갑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은 대부분 눈물을 쏟고 나서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라는 감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째 관람 이후부터 그 감동 뒤에 묘한 찜찜함이 남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수용소 안에 수개월째 숨겨두는 설정, 방송실을 아무도 모르게 점거하는 장면, 독일 장교 클럽에서 자유롭게 웨이터 역할을 하는 귀도의 모습은 역사적 고증(Historical Accuracy) 측면에서 심각한 균열을 드러냅니다. 작품이 특정 사건을 재현할 때 실제 기록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역사적 고증의 측면에서 보면, 귀도와 조슈아가 같은 막사에서 수개월을 버티는 설정은 분명 기적에 가까운 허구입니다.

실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수용소의 관리 체계는 철저한 감시와 즉결 처형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셈(Yad Vashem)의 기록에 따르면, 수용소 내 아동은 대부분 도착 당일 가스실로 직행했으며 성인과의 동거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출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 이 맥락에서 보면 귀도와 조슈아가 같은 막사에서 생활하며 수개월을 버티는 서사는 극적 허용의 수준을 넘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단순히 역사를 팔아먹은 감동 상업 영화라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본인이 파시스트 시대를 실제로 겪은 아버지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가 전달하는 정서적 진실만큼은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강렬하게 관객의 심장에 박힌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일종의 우화(Fable)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상징과 허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 진실을 꿰뚫는 우화(Fable)의 렌즈로 이 영화를 바라볼 때, 개연성의 빈틈은 비로소 숭고한 서사적 장치로 승화됩니다. 르포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방식이죠. 이 렌즈를 끼고 보면 개연성의 구멍들은 오히려 의도된 서사적 장치로 읽히고,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 즉 사랑은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는 명제가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홀로코스트 전체에 대한 이해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귀도의 이야기는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영화가 끝나고 조슈아와 도라가 재회하는 장면을 보며 저는 두 아이를 떠올렸습니다. 제 자녀들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기억으로 쌓고 있을지 생각하니, 귀도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리얼리즘에 대한 기대보다는 인간 존엄에 대한 질문 하나를 들고 극장에 들어가시길 권합니다. 이미 보셨다면 한 번 더, 두 번째 관람을 권합니다.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질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리뷰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보니, 첫째 아들과 작은 딸이 투닥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귀도처럼 거창한 거짓말을 할 상황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퇴근 후 현관문을 열 때만큼은 업무의 숫자 압박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아빠가 되려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세상은, 아빠의 굳은 표정이 아니라 환한 웃음으로 가득 찬 곳이어야 하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TeE0MWjgp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