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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제가 '목표 중독'에 걸려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픽사의 소울(Soul, 2020)은 그 사실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꽤 세게 일깨워줬습니다. 재즈 뮤지션의 꿈을 좇는 조 가드너와 지구행을 수천 년째 거부하는 영혼 22번의 이야기인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사후 세계를 설계한 방식, 얼마나 기발했나
픽사가 설계한 세계관은 사후 세계와 '인생 연구소(The Great Before)'라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축으로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영혼들이 지구로 내려가기 위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스파크(Spark)는 삶을 향한 강렬한 동기이자, '살고 싶다'는 의지에 불을 붙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꽤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고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Telos) 개념은, 영화 속 영혼들이 자신만의 스파크를 찾아 헤매는 여정의 철학적 뿌리가 됩니다.
22번 영혼의 멘토로 마더 테레사, 무하마드 알리 같은 위인들이 등장하는 설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22번은 수천 년간 지구행을 거부합니다. 처음엔 그냥 고집스러운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거부감이 '삶에 의미가 없으면 살 이유도 없다'는 공허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번아웃 상태일 때 드는 감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더군요.
영화 속 세계관의 시각적 설계도 언급할 만합니다. 인생 연구소의 관리자들은 기하학적 선으로만 이루어진 추상적 형태로 등장합니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의 존재와 원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영역을 기하학적 선으로 구현해 낸 인생 연구소의 풍경은 독창적이지만, 동시에 관객의 직관적인 공감을 방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스파크의 정체, 꿈인가 삶 자체인가
영화의 핵심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스파크는 꿈이나 직업적 목표인가, 아니면 그냥 살아 있다는 감각 자체인가.
조 가드너는 평생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꿨고, 드디어 전설적인 무대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꿈을 이룬 날 밤, 그는 묘한 공허함을 느낍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굉장히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염원하던 무대를 마친 조 가드너를 덮친 허탈감은, 목표에 도달하면 무조건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 착각인 도착의 오류(Arrival Fallacy)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목표를 이루는 순간 오히려 큰 허탈감이 찾아오는 이 현상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목표 중독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서글픈 진실이기도 하죠(출처: Harvard Extension School).
반면 22번이 조의 몸으로 처음 경험하는 것들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피자 한 조각의 맛, 거리의 소음,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 이것들은 어떤 위인의 멘토링으로도 전달되지 않았던 감각입니다. 22번에게 스파크를 준 건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감각이었습니다.
소울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스파크는 꿈이나 직업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순간일 수 있다.
- 꿈을 이룬 후에도 공허할 수 있으며, 그건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삶의 의미는 도달 지점이 아니라 걷는 과정 자체에 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이 메시지를 단순히 "소소한 일상을 즐기라"는 힐링 문구로 읽으면 영화가 반쯤만 보인 겁니다. 조가 22번이 두고 간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일상의 무게를 다시 느끼는 장면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직면에 가깝습니다. 그 씁쓸함이 있어야 마지막 단풍나무 씨앗 장면이 제대로 울립니다.
기발한 상상력, 그러나 남은 아쉬움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꽤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몇 가지 찜찜함이 남았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픽사의 전작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2015)은 감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의인화(Personification)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직관적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추상적인 감정에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는 의인화(Personification) 기법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인사이드 아웃》과 달리, 《소울》의 추상적인 캐릭터들은 가슴보다 머리로 먼저 이해해야 하는 거리감을 만듭니다.
반면 소울의 영혼들은 형체가 없는 둥글둥글한 형태이고, 관리자들은 기하학적 추상 도형입니다. 독창적이지만 시각적 역동성이 낮고, 감정 이입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제가 직접 주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 봤는데, "뭔가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반응이 꽤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22번의 감정 변화 속도입니다. 수천 년간 삶을 거부하던 존재가 단 며칠의 경험으로 지구행을 결심하는 전환은, 서사의 밀도에 비해 결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픽사 작품의 스토리텔링 완성도에 대한 학술적 평가에서도 소울은 서사 구조의 일관성 측면에서 인사이드 아웃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현실의 좌절이나 냉혹함을 좀 더 껴안는 결말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해피엔딩이 조금 빠르고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건 영화의 실패가 아니라, 기대치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울은 분명 대단한 영화입니다. 다만 완벽한 명작이라기보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다소 서둘러 매듭짓는 영화입니다. 그 질문 자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마무리의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됩니다. 목표만 보느라 오늘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22번이 처음 피자를 베어 물던 그 표정이 떠오르거든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아이들이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 처음 아이스크림을 맛봤을 때 느꼈던 그 순수한 환희가 바로 아이들의 '스파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인생의 '스파크'는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아이들이 처음 아이스크림을 맛볼 때 느끼는 그 순수한 즐거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빠인 제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오늘 하루 우리 곁에 있는 작고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법인 것 같습니다. 이번 가족 여행이 우리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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