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국정원 요원과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붙는 첩보 액션 영화입니다. 업무 일정에 치여 지쳐 있던 날, 퇴근 후에 반신반의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첫 액션 시퀀스가 터지는 순간 그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갔습니다.
첩보액션의 외피, 그 안의 생존기
기계적인 위성이나 드론이 아닌, 오직 사람의 몸과 신뢰 관계를 정보원으로 삼는 휴민트(HUMINT)의 본질은 영화 전반에 꽤 충실하게 흐릅니다. 정보가 곧 사람의 숨결에서 시작된다는 이 제목의 의미는 단순한 첩보물을 넘어선 묵직한 예감을 줍니다.
국정원 조 과장은 북한 출신 여성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왔고, 그중 한 명이 눈앞에서 죽는 장면이 영화의 출발점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단순한 첩보물이 아니라 사람을 도구로 쓰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대체로 맞았습니다.
조 과장은 인신매매의 진원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고, 북한 국가보위성의 박건 역시 같은 사건을 추적하며 현지에 도착합니다. 북한 총영사 황치성은 러시아 마피아와 결탁한 인물로, 북한 식당 종업원 최선화를 둘러싼 세 인물의 암투가 영화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생각보다 이야기의 전모가 빠르게 드러나는 편이라, 극 초반부터 캐릭터의 입장과 욕망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리됩니다.
홍콩누아르의 문법과 류승완의 손맛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강하게 느낀 건 홍콩 누아르 장르의 문법이 살아 숨 쉰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른 진영의 두 남자가 적에서 동지로 변모하며 비장한 총격전을 벌이는 홍콩 누아르 특유의 쌍남 구조는 류승완의 손끝에서 2026년의 감각으로 부활합니다.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오우삼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 이 문법은, 역대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막판 등을 맞댄 총격 장면은 오우삼의 첩혈쌍웅을 떠올리게 하고, 세 인물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트라이앵글 스탠드오프 장면은 두기봉의 엑사일 등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홍콩 액션 문법 그대로입니다. 방탄유리 쇼케이스를 이용한 액션 기믹이나 금발 외국인 악당의 등장은 성룡 영화의 톤과 겹치기도 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리듬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느냐 낯설게 느끼느냐가 이 영화의 호불호를 갈라놓는 핵심 변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콩 영화를 즐겨 본 관객이라면 대치 국면이 해소되고 다시 액션으로 점화되는 그 타이밍 자체가 주는 쾌감을 바로 알아채겠지만, 그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한국 영화 관객의 장르 선호도에 대한 조사를 보면, 20~30대 젊은 층은 마블 식의 빠른 편집과 유머 코드가 섞인 액션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휴민트의 문법은 그것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에, 세대에 따라 반응이 꽤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멜로한계와 박정민이라는 패러독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조인성의 액션은 기대 이상이었는데, 멜로가 생각만큼 잘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박건과 최선화가 처음 만나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에서 감정의 전달이 매끄럽지 않아서, 황치성이 굳이 "두 분이 아는 사이 같다"라고 설명해 주는 대사를 넣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제 경험상 멜로가 제대로 스며드는 영화는 대사 없이도 감정이 전해지는 법인데, 이 영화에서 박건과 최선화 사이의 감정선은 좀 더 공들인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2할의 첩보, 4할의 멜로, 4할의 액션으로 보이는 구성인데, 멜로의 비중이 임팩트로는 그에 못 미친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박정민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북한 말투를 소화하면서 고강도 액션까지 전부 해냅니다. 카메라를 직접 손에 들고 배우의 거친 호흡과 함께 움직이는 핸드헬드(Hand-held) 촬영은, 타격감을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합니다. 박정민은 이 불안정한 앵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캐릭터를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오히려 캐릭터보다 배우가 먼저 보이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박건이 발차기를 하는 것보다 박정민이 발차기를 하는 것이 보이는 느낌. 이게 좋은 건지 아쉬운 건지, 솔직히 저도 아직 정리가 안 됩니다. 이런 한국 액션의 최고난이도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박정민뿐이라는 점에서, 결국 패러독스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 장단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조인성의 길쭉한 프로포션을 살린 코트+총격 액션의 시각적 완성도
- 홍콩 누아르 문법을 한국 첩보물에 접목한 류승완만의 연출 감각
- 황치성 캐릭터의 평면성과 멜로 감정선의 부족한 설득력
- 젊은 관객층과 홍콩 영화 팬 사이의 온도 차
액션의 쾌감, 그리고 남는 아쉬움
렌즈 앞에 특수 유리를 덧대어 화면의 전경과 후경을 동시에 선명하게 포착하는 스플릿 포커스 디옵터(Split Focus Diopter) 기법은 비주얼의 깊이를 더합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를 연상시키는 이 감각적인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해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비주얼적으로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앉아서 느낀 것은, 중반까지 두 개의 큼직한 액션 시퀀스가 있고 후반 구출극 시퀀스가 가장 몰입감이 높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구출극 부분에서 인신매매 피해 여성들이 하얀 옷을 입고 사방으로 도망치는 장면은 오우삼 영화의 비둘기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도 훨씬 현실적인 무게감을 가졌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의 흥행 분석에 따르면 감독의 전작 팬층이 두텁고 액션 장르 충성도가 높은 관객군이 초반 흥행을 이끄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류승완 감독의 팬이라면 이 작품은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을 제약 없이 쏟아낸 영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단순히 시원한 타격감에만 취하기엔, 인물들의 감정선과 첩보전의 쫀쫀함이 조금 더 살아 있었으면 훨씬 강렬하게 남았을 작품입니다. 맵고 칼칼한 짬뽕에 설탕이 들어간 것처럼, 장르의 순도가 섞인 느낌이 끝내 마음에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감독은 류승완뿐이라는 것도, 그래서 더 아쉽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같으면 500만 관객은 무난히 넘었을 규모의 영화인데, 지금 관객이 이 문법을 얼마나 따라가 줄지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홍콩 누아르의 감성을 좋아하거나 류승완 액션 특유의 리듬에 익숙한 분이라면 극장에서 보는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