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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가상의 영화 하나를 놓고 이렇게 오래 깊은 생각에 잠길 줄은 몰랐거든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는 아직 상상 속에 있는 작품이지만, 그 구조와 메시지를 들여다보면서 저는 제 삶의 어느 한 대목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끝났다 싶으면 또 어김없이 시작되는 그 외로운 싸움들 말입니다.
60년대의 언어로 지금을 말하다
처음 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접했을 때, 제가 직접 느낀 건 시대 설정이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는 멕시코 국경 이민자 구금소 습격으로 문을 엽니다. 저항 조직 '프렌치 75'가 군기지를 공격해 이민자들을 해방시키는 이 오프닝은 스펙터클 하지만, 그 이름 하나에도 꽤 촘촘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프렌치 75'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빠른 연사와 정밀 타격으로 상대를 제압했던 프랑스군 핵심 화포인 야포(野砲)의 명칭으로, 이름 자체에 지독한 속도와 폭력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이 조직은 결국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자멸합니다. 날카로운 이름과 달리 그 거창한 혁명의 실체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죠.
영화가 깔아 두는 역사적 코드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과거 1950~70년대 미국 FBI가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세력을 조직적으로 감시하고 무력화시켰던 추악한 비밀공작 프로그램, 코인텔프로(COINTELPRO)의 어두운 유산이었습니다. 극 중 "흑인 여자는 특히 안 봐줘"라는 날 선 대사 한 줄은 이 역사를 정확히 가리킵니다. 당시 백인 여성 활동가들과 달리 흑인 여성들은 훨씬 가혹한 국가 폭력의 처벌을 받았다는 실제 기록이 있고, 영화는 이를 선언처럼 내뱉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묘한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60년대의 언어인데, 2026년 지금 마주해도 전혀 낡지 않아 보여서요(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PTA 감독이 이 60년대라는 격동의 시기를 택한 건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닙니다. 국가 폭력과 저항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이 시대는, 지금 미국이 다시 마주하고 있는 인종과 계층의 균열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입니다. 특정 시기의 사회적 맥락과 서사가 정교하게 맞물려 관객의 가슴에 강력한 파고를 일으키는 시의성(時宜性)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 세계 평단이 오스카의 가장 유력한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지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록조라는 인물이 드러내는 권력의 속살
제 경험상 이런 영화에서 진짜 무서운 건 악당이 너무 악당처럼 생기지 않았을 때입니다. 존 펜이 연기하는 IC 부대장 스티븐 록조 대령이 딱 그런 인물입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를 제도화한 권력 카르텔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입회하기 위해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숨기고, 주인공의 딸 윌라를 잔인한 표적으로 삼습니다.
록조의 소름 끼치는 묘미는 그의 모순에 있습니다. 잡혀 온 윌라에게 "쥐새끼인 어미와 기질이 비슷하다"라고 내뱉는 장면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층위가 다른 멸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결정적 순간, 클럽 면접에서 그가 오히려 "내가 시도둑질을 당했다"라고 토로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 순간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아이러니입니다. 스스로를 철저한 피해자라 믿는 맹목적인 가해자, 그게 록조라는 인물의 본질이거든요. 저는 이 대목에서 존 펜의 연기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으면서 인물의 내면적 균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이 탁월했습니다.
미국 정치학회(APSA)의 연구 결과처럼 구조적 인종주의와 제도권 폭력은 세대를 넘어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을 보입니다(출처: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록조가 체현하는 권력은 개인의 악함이 아니라 바로 그 견고하게 반복되는 시스템입니다. 영화가 그를 화려한 집무실이 아닌 초라한 사무실에서 최후를 맞게 하는 것도 그 구조의 허망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며,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 장치들은 미국 내 인종 억압의 잔혹함을 소리 없이, 하지만 묵직하게 증명해 줍니다.
진짜 혁명은 가장 평범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서 제가 가장 오래 멈춰 선 지점은 화려한 습격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술독에 빠져 삶이 망가진 아버지 밥이, 딸 윌라에게 60년대 TV 쇼 제목을 둘만의 암호로 건네는 순간이었습니다. 윌라가 그 위험한 암호를 온전히 따르는 건 시스템이 정교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을 건넨 사람이 내 아빠라는 단 하나의 믿음 때문입니다. 이게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렌치 75'는 거창한 이념의 암호 체계에 집착하다가 무너졌고,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기만적인 자격 기준에 집착하다가 스스로를 부패시켰습니다. 반면 밥과 윌라 사이에는 어떤 이념도, 거대한 조직 논리도 없습니다. 그냥 아빠와 딸이라는 핏줄의 신뢰 하나뿐입니다. 이 영화는 그 평범한 믿음이 세상의 어떤 혁명적 선언보다 단단하다고 나지막이 말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저는 거친 풍파 속에서 딸을 지키기 위해 만신창이가 된 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유독 먹먹하고 시렸습니다. 거창한 사회적 혁명도, 깃발을 든 광장의 함성도 결국 내 아이가 발을 디디고 살아갈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부모로서의 뼈저린 현실 감각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게 몰아치고 다음 전투가 나를 기다릴지라도,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안전한 방어벽이 되어줄 수 있는 아빠라는 품이야말로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내야 할 진짜 전장임을 다짐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2026년 현재의 팍팍한 삶과 자꾸만 겹쳐 생각하게 됐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치를 웃돌고 있으며, 취업이라는 관문을 넘으면 생존이, 생존을 넘으면 내 집 마련이, 그 뒤엔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립니다(출처: 통계청). 영화 제목처럼, 하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전투가 시작되는 이 피로한 구조는 스크린 밖 우리의 현실에도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인물의 감정 변화와 내면의 미세한 균열을 화면 가득 담아내어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는 촬영 기법인 클로즈업(Close-up)을 PTA 감독이 하나의 정교한 감정 지도처럼 펼쳐 보이고, 여기에 조니 그린우드의 불안성 높은 음악이 더해진 서사적 연출력은 가상의 작품임에도 경이로운 흡인력을 자랑합니다. 외부의 스펙터클에 치중하느라 인물들의 고독과 슬픔이 다소 얕아진 극작술의 아쉬움은 남지만, "진짜 혁명은 지친 몸으로 내 아이 앞에 버티고 서는 부모의 모습"이라는 결론만큼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영화가 실제로 세상에 나온다면, 극장을 나오면서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그 다정한 전화 한 통이, 어쩌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거친 삶의 전투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가장 작고 진짜인 혁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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