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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삶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냥 웃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저도 한때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조커'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웃음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어떤 결말을 부르는지, 이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서늘하게 보여줍니다.

아서의 심리적 변화, 어디서부터 무너졌나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을 단순히 한 개인의 광기로만 읽으면 영화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서의 '춤'이었습니다. 그 춤은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폭행을 당한 날도, 직장에서 해고된 날도, 처음 살인을 저지른 날도 아서는 춤을 췄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죠.

 

영화는 아서의 심리 붕괴를 설명하기 위해 해리(dissociation) 현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자아가 현실과의 끈을 놓아버리는 해리(Dissociation) 현상은, 아서가 망상 속에서 소피와 연애하며 잠시나마 안식을 찾는 처절한 방어 기제로 작동합니다. 소피와의 장면이 허상임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그의 자아가 이미 오래전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갔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렇게 뒤늦게 반전을 깔아 두는 연출은 관객에게 아서에 대한 섣부른 연민을 허락한 뒤 그 연민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아서의 변화를 이끈 핵심 요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회적 지지 체계의 완전한 부재: 정신과 상담이 예산 삭감으로 중단되고, 직장과 동료마저 잃습니다.
  • 세 명의 '아버지 상실': 총을 준 랜들, 우상이었던 코미디언 머레이, 그리고 토마스 웨인. 셋 모두 결정적인 순간 아서를 배신하거나 외면했습니다.
  • 출생의 비밀과 아동 학대 트라우마: 자신이 입양되었고 학대받았다는 사실은 아서에게 남은 마지막 정체성마저 무너뜨렸습니다.
  • 분장 뒤에 숨긴 감정의 폭발: 엄마가 그를 '해피'라고 불렀고, 그는 평생 웃는 광대 분장 뒤에 모든 감정을 쑤셔 넣었습니다.

영화 속 조명의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이 밝아지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서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신호입니다. 후반부의 역설적인 밝음은 아서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정신증(Psychosis)의 세계로 완전히 진입했음을 알리는 서늘한 신호입니다. 뇌가 구축한 가짜 세계의 조명이 밝아질수록, 그가 딛고 선 현실의 토양은 무참히 무너져 내립니다. 우울증 환자가 조현병적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묘사한 영화를 저는 전에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구조적 폭력이 만든 괴물,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위험성

사회학자 요한 갈퉁이 제시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복지 예산 삭감과 의료 지원 중단처럼 사회 시스템 자체가 특정 계층의 생존을 위협하는 구조적 폭력은, 아서라는 연약한 개인을 조커라는 괴물로 빚어낸 진정한 배후입니다. 주먹보다 더 잔인하게 개인의 삶을 으스러뜨리는 보이지 않는 손인 셈이죠. 아서에게 가해진 가해는 누군가 직접 휘두른 물리적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복지 예산 삭감, 의료 접근성 박탈, 계층 이동의 불가능성처럼 시스템이 한 개인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가해였고, 이것이 아서를 조커로 만든 진짜 원인이었습니다. 실제로 정신질환자 복지 사각지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수준으로, 정신건강 위기 대응 체계의 부실함이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영화는 이 구조적 폭력을 고발하는 데 있어 탁월합니다. 언론이 토마스 웨인의 편에 서 있고, 빈민가 주민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됩니다. 아서의 어머니조차 기득권의 홍보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은둔형 외톨이 문제나 온라인에서 번지는 계층 혐오의 정서가 고담시의 폭동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 건 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서에게 감정 이입이 되면서도, 계단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 제가 느낀 감정이 카타르시스(catharsis)였다는 사실이 영화관을 나온 뒤 불편하게 맴돌았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린 분노가 폭발하며 얻는 정서적 해방감, 즉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조커의 살인 장면에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연출됩니다. 영화는 이 정화의 감각을 연쇄 살인이라는 극단적 폭력과 위험하게 겹쳐놓으며 관객의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지점이 이 영화의 가장 뼈아픈 도덕적 한계입니다. 아서가 겪은 고통은 진짜이고, 그 고통의 원인을 만든 사회 구조에 분노하는 것도 타당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분노가 무고한 타인을 향한 살인으로 터지는 순간을 너무나 아름답고 해방감 넘치게 연출해 버립니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고, 카메라는 오로지 조커의 황홀한 해방감만을 쫓습니다. 이런 시각적 쾌감이 현실의 소외된 이들에게 파괴 충동을 정당화하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는 우려는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 개봉 당시 미국에서는 이 영화가 모방 범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일부 극장이 경비를 강화하기도 했습니다(출처: FBI 공식 사이트).

 

선량한 시민들이 조커의 광기에 집단으로 열광하며 도시를 불태우는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을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군중으로만 그리는 방식은, 아서만큼이나 복잡한 맥락을 가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지금 내 주변에 아서처럼 모든 감정을 웃음 뒤로 숨기며 버티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화날 때 화를 표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환경인지,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의 도덕적 한계는 비판해야 하지만, 그 한계 너머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사회적 질문만큼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조커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이번엔 아서의 춤이 언제 나오는지에 주목하며 보시길 권합니다.

 

아서가 그토록 원했던 건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어쩌면 따뜻한 밥 한 끼와 누군가의 진심 어린 관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웃음'만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슬플 때 울고 힘들 때 기대는 솔직한 감정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나길 바라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C3xE4Aie30